에티엔 발리바르가 칭찬을 아끼지 않고 논문심사며 프랑스어판 출판까지 주선했다는 책, 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의 초역을 끝냈다. 그다지 어려운 일본어가 아닌지라 초벌은 쉽게 끝냈지만, 문제는 이제 프랑스어 원판과 대조하면서, 또 수많은 원문과 국역본을 대조하면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늘 그렇듯이, 튼실한 이들이 도움을 줄 것이므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아래는 발리바르가 붙인 서문의 초역이다. 초역이라고는 하지만 프랑스어판과 대조도 하지 않았고, 일본어판을 그대로 번역한 것도 아니다. 실제 출판에서는 이런 과정들이 모두 개입되므로 크게 바뀔 것이다. 출판사의 허가 없이 내 마음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뭐라고 하든 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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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요시유키의 <<권력과 저항>>은 파리10대학(낭테르대학)에 제출된 「구조주의와 저항의 문제」에 관한 빼어난 박사논문을 토대로 한 것이다. 논문의 심사위원은 나를 포함해 주디스 버틀러, 피에르 마슈레, 카트린느 마라부, 베르트랑 오지르비였다. 이 책은 젊은 외국인 철학자들 ― 특히 일본의 ― 이 오늘날 하고 있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에 대한 독해가 지닌 빛나는 날카로움, 깊이, 독창성을 보여준다. 그러한 독해를 통해 새로운 신선함, 새로운 관점, 새로운 문제가, 그리고 또한 열심히 진행된 논의의 재개가 적절한 시기에 우리에게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참가한 사람으로서, 나는 다른 참가자들과 더불어 그 모든 길을 함께 걸었다고 믿고 있는데, 그렇게 믿는다고 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니리라. 나는 이러한 논의의 비판적 회귀와 재연을, 커다란 기쁨을 가지고 환대한다.
이 책은 내용 면에서의 장점과 더불어, 형식 면에서의 장소(長所)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논의가 극도로 응축된 것은 이 책이 지닌 기법의 징표이기도 하다. 논의의 응축은 명확함, 특히 논의의 엄밀함과 건축술의 힘을 수반한다. 이 문장에서 과잉인 것은 한 글자도 없다. 모든 것이 말해지고 있는 것일까? 물음을 제기하고, 그것을 음미하기 위한 모든 것이, 확실하게 말해지고 있다. 그 물음이란 어쩌면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를 포함)가 제기하는 기본적 물음 그 자체이며, 이러한 물음은 ‘구조주의’의 존재 전체로 확장되며, 오늘날에도 그 현재성을 계속 만들어내고 있다. 텍스트에 관한 지식과 그 철학적 배경에 관한 지식은 완벽하다. 이로부터 곧바로, 사토는 이중의 비교라는 착상을 제시한다. 그것은 푸코와 들뢰즈, 알튀세르와 데리다의 비교이며, 이것이 그의 작업을 이끈다. 그러나 이 착상은 전개의 도중에서 생겨나는 두 개의 역설적인 물음을 둘러싸고 방향전환을 하며 갱신된다. 그 물음이란 ‘저항의 지배에의 내재성’에 관한 물음과, ‘죽음의 욕동’에 관한 프로이트의 개념 ― 그것은 모든 ‘구조주의 이론’이 정신분석에 대해 지닌 관계의 핵심을 이룬다 ― 이 내포한 모순에 관한 물음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모든 진부함을 벗어날 수 있게 되며, 특히 기본 개념인 ‘저항’의 개념이 확실히 문제화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토가 구축하는 셰마는 그 자체로 주목해야 할 구조상의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대답을 요약하고 분류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물음을 만들어낸다. 명확히 표정(標定) 가능한 그러한 물음 속에서, 몇 가지의 것은 담론의 분류와 관련된다. 사토는 동시대의 비평적 담론에서 푸코-알튀세르(‘권력’과 ‘갈등’의 철학자), 데리다-들뢰즈(‘차이’의 철학)라는 분류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런 분류보다는 횡단적인 분류를 선택했다. 즉, 푸코와 들뢰즈(그리고 가타리), 알튀세르와 데리다라는 분류이다. 특히 이 사선에 의해 그는 라캉의 담론의 특이한 위치를 바깥으로 드러낸다. 즉, 구조주의의 타자 ― 만일 저항을 사유하는 모든 가능성을 말소한다고 여겨지는 담론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가 오히려 구조주의의 가장 ‘전형적인’ 대표자가 아니라고 한다면 ― 라는 위치이다. 사토는 이 테제가 두 개의 상이한 수준에서 명료하게 될 수 있음을 잘 고려하고 있다. 즉, 한편에서는 역사적, 심리적인 정치적 염세주의의 수준(“혁명가로서, 당신은 한 명의 스승을 찾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그 스승을 얻을 수 있을 거요!”)이며, 다른 한편으로서 알튀세르가 말한, ‘운명의 철학’이라는 초월론적 수준이다. 후자의 수준에서는 ‘중심의 외화’(excentration de centre, 그것에 관해 라캉은 ‘외밀성外密性’이라는 조어를 만들어냈다. 이 말은 피하기 힘든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나게 한다)가 ‘타자’의 지배로부터 주체를 해방시키는 것의 불가능성을 영원히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논증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 대해 데리다와 라캉이 취한 정반대의 관계에 관한 놀라운 독해로 열리게 된다. 이 독해는 구조에의 복종화와 권력에의 복종화의 관계, 또는 양자의 동일성 ― 특히 사토가 최초의 정식화를 빚지고 있는 푸코의 경우에는 ― 을 해명하는 열쇠를 품고 있다. 마지막으로, 동일한 형식적 셰마는, 들뢰즈-푸코, 알튀세르-데리다의 관계 사이에서 그가 상정한 평행관계인데, 이로 인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게 된다. 우리는 앞의 경우와 똑같이, 두 명의 철학자의 근접하면서도 환원 불가능한 담론의 대결에 의해 매개된, 어떤 ‘제2의 입장’에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이 중요한 유비의 열쇠를, 특히 이 책에서 상세하게 이용하고 있는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 속에서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사토 요시유키의 박사논문의 구두시험에서 버틀러가 그의 분석에 대해 보인 관심을 설명한다. 그녀가 관심을 보인 분석이란 특히 죽음의 욕동의 문제구성과 ― 복종화의 구조적 효과들의 예측 불가능한 절단(切斷)으로서 이해된 ― 구조들의 우연성의 문제 사이의 관계이다. 대화는 거기에 소묘되었으며, 어쩌면 속행이 요청되고 있다.
나는 새로운 참가자를 겨냥하여 논의의 범위를 확대하고, 사토의 시론에서 논해진 해석과 주장이 제기하는 많은 문제에 관해 고찰을 계속하고 싶다. 이러한 물음 속에서, 나는 특히 두 개의 물음에 대해 언급해 두겠다. 그것들은 특히 죽음의 욕동과 연결된 “새로운 이율배반”에 관한 심원한 견해를 통해서 서로 관련되어 있다. 이 이율배반이란 죽음의 욕동이 필연성인 동시에 비결정이며, 생의 파괴인 동시에 생의 보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기에서 인과성과 자유에 관한 고전적 (칸트적) 이율배반을 강한 의미에서 이어받고 잇다.
첫 번째 물음은 ‘외재성’과 ‘내재성’의 대립의 상대화에 관한 것이며, 구조주의와 그 비판적 완성의 전개에 있어서,능동성과 수동성이라는 문제구성이 획득한 중심적 중요성과 관련되어 있다. ‘능동적 수동성’이라는 역설적 가능성, 또는 환언하면 단순히 반동적=반응적 ‘저항’이라는 개념을 물리치는, 수동성 자체를 통한 수동성의 너머라는 역설적 가능성은 새로운 초월론적 형상을 소묘하고 있다. 그 형상은 푸코에 의한 칸트 비판을 따라서 사토가 ‘초월론적 시선’이라고 부른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가 그 의미작용을 검토하는 것은 데리다에 관해서다(따라서 잠재적으로는 알튀세르에 관해서다). 그렇다면 푸코, 들뢰즈와 가타리에 관해서는 어떨까? 우리는 여기에서 ‘차이의 철학’이라는 견해가 적절하다고 생각하고픈 유혹에 이끌린다. 왜냐하면 수동성의 너머 ― 수동성은 그것으로서 (잔학성, 지배 또는 점유에의) 저항을 이루는 ― 라는 개념, 혹은 ‘타자-되기’라는 개념이 보다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데리다와 들뢰즈에게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항’이라는 개념이 진정으로 일의적인 것인가라는 물음이 끌려나오게 된다. 동일한 지적은, 데리다의 담론이 보여주는, 혹은 그의 분석에 관해 이 책에서 수행된 설명이 보여주는 가장 곤란한 물음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즉, 재생산의 시간의 사건에 의한 절단은 필연적으로 해방으로, 정의의 생기로 열려지게 되는가, 혹은 그것은 항상 또한 다른 결과의 가능성, 즉 억압적이고 ‘데모닉쉬한’ 결말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이율배반적인 복수의 가능성 사이에서의 결정 혹은 실천적 자유를, 항상 또한 ***에 개입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어쩌면 이러한 ‘앞으로의 도주’(fuite en avant), 혹은 정치적 어려움의 이러한 무한반복을 피하기 위해서 알튀세르가 ‘부재의 원인’이라는 셰마를 제시할 때, 그는 ‘최종심금에서의 결정’이라는 개념을 ‘과잉결정/중첩결정’이라는 또 다른 개념에 대해 유지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최종심급은 맑스주의의 전통을 따르는 형태로, 그에게 역사의 방향성을 ‘보증해 주었기’ 때문이다. ― 실제로, ‘최종심급의 때를 알리는 종은 결코 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색적인 동시에 윤리 및 정치에 직결된 이 물음이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환상을 품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토 요시유키가 그것에 부여한 명확하고 날카로운 설명은 효과를 미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가 아주 멀리서부터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부터) 우리에게 그러한 물음을 제시해 준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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